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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테 나리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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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테 나리요시는 1798년 센다이 번의 다이묘 다무라 무라스케의 아들로 태어났다. 1819년 센다이 번의 11대 번주가 되었으며,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로부터 이름을 받아 나리요시로 개명했다. 그는 종4위 하위의 관위와 무쓰노카미라는 가명을 받았다. 1826년 시바히메와 결혼했으나 2년도 채 되지 않아 3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사후 센다이 번의 후계자 문제로 인해 다테 나리카니가 12대 번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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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테 나리요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다테 나리요시의 초상, [[센다이 시 박물관]] 소장
다테 나리요시의 초상 (센다이 시 박물관 소장)
이름다테 나리요시 (伊達斉義)
로마자 표기Date Nariyoshi
출생1798년 4월 22일
출생지에도, 일본
사망1828년 1월 13일
다른 이름기치고로 (吉五郎, 유년기 이름)
다무라 아키요시 (田村顕嘉)
다테 무네요시 (伊達宗義)
시호쇼잔 공 (正山公)
계명조겐인덴 쇼잔 에이소 다이코지 (曹源院殿正山栄宗大居士)
묘소미야기현 센다이시의 쿄가미네 다테 가문 묘소
통칭이와미 → 도지로
관직
관위종4위하 좌근위권소장, 무쓰 국
막부에도 막부
주군도쿠가와 이에나리
가문다무라 씨 → 다테 씨
가족 관계
아버지다무라 무라스케
어머니와키사카 야스타카의 딸, 아코토
양아버지다테 나리무네
형제자매쇼고로
데쓰야
오카네
다무라 아키요시 (본인)
다무라 아키토모
조 등
배우자정실: 다테 나리무네의 딸, 사이히메
측실스나자와 사다에의 딸, 미주
야마모토 다카카쓰의 딸, 쓰네코
자녀게이쇼인
기마루
요시쿠니
요리
야스코
양자나리쿠니
센다이 번주
무쓰 센다이 번
재임 기간1819년 ~ 1828년
이전 번주다테 나리무네
다음 번주다테 나리쿠니

2. 생애

1819년 아오바 성으로 소환되면서 전환점을 맞았다. 다테 나리무네가 후계자 없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센다이 번은 도쿠가와 막부와의 관계에서 매우 불안정한 입장에 놓였다. 다테 나리무네와 그의 전임자 다테 치카무네는 모두 후계자 없이 사망했고, 막부는 다테 가문의 지속을 보장하기 위해 특별한 조치를 취했으나, 짧은 기간 안에 세 번째 사례가 발생하면서 번은 몰수될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나리요시는 나리무네의 세 살 된 딸 시바히메와 약혼하고 '''다테 무네요시'''라는 이름을 사용했으며, 센다이의 11대 다이묘로 선포되었다. 석 달 후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에게 공식적인 알현을 받았고, 이 알현에서 이에나리의 이름에서 한자를 받아 '''다테 나리요시'''가 되었다. 그는 종4위 하위의 관위가명인 ''무쓰노카미''를 받았다.[1]

분세이 9년 2월 22일 (1826년)에 나리무네의 딸인 시바히메와 혼례를 올렸지만, 분세이 10년 11월 27일 (1828년1월 13일)에 에도에서 사망했다. 향년 30세 (만 29세)로, 그의 사망으로 센다이 번 내의 후계 문제가 다시 불거졌고, 그의 아들이자 상속자는 여전히 어린아이였다.[1]

2. 1. 출생과 가계

1798년 4월 22일(간세이 10년 3월 7일) 나리요시는 에도에서 태어났다. 그는 센다이 번의 5대 번주 다테 요시무라의 손자이자, 이치노세키 번의 다이묘인 다무라 무라스케의 넷째 아들이었다.[1] 어머니는 와키사카 야스치카의 딸이며, 어린 시절 이름은 키치고로(吉五郎)였다.

나리요시가 태어난 직후, 아버지 무라모토는 은거하고 다무라 가문은 이미 양자가 된 무네아키가 상속했다. 1812년(분카 9년) 원복하여 를 '''아키요시'''(あきよし), 통칭을 이와미라고 칭했다. 그러나 무네아키는 나리요시가 적절한 나이에 이르지 못했다는 이유로 양자로 삼지 않았고, 나리요시는 헤야즈미 신분으로 이치노세키로 내려갔다.[1]

2. 2. 센다이 번주 취임

분세이 2년(1819년) 4월 26일 이치노세키에서 센다이성으로 불려와 센다이 번의 번정을 섭관하게 되었다.[1] 같은 해 5월 25일, 후계자 없이 사망한 10대 번주 나리무네의 딸과 약혼하고, 사위 양자라는 형태로 11대 번주로 취임했다. 당시 약혼녀 시바히메는 3세였다. 같은 해 5월 27일에는 를 다무라에서 다테로, 통칭을 이와미에서 도지로나로 고쳤다.[1]

같은 해 7월, 죽은 양아버지 나리무네에게서 1자를 받아 휘를 '''무네요시'''(むねよし)로 고쳤다. 8월에는 에도로 올라가 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를 알현하고 '''나리요시'''(なりよし)로 개명,[3] 종사위 소장에 임명되고 무쓰노카미가 되었다.[1]

나리무네의 후계 후보로는 나리요시 외에도 도메 다테 가문의 다테 무네미쓰[4]의 아들 고고로(후의 12대 번주 나리쿠니, 당시 2세)와 와쿠야 다테 씨의 겐지로(후의 다테 요시모토)가 있었으나, 나리무네와의 혈통 및 나이를 고려하여 나리요시가 적당하다고 여겨졌다.[1]

다테 나리무네가 후계자 없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센다이 번은 도쿠가와 막부와의 관계에서 매우 불안정한 입장에 놓였다.[1] 나리무네와 그의 전임자 다테 치카무네는 모두 후계자 없이 사망했고, 막부는 다테 가문의 유지를 보장하기 위해 특별한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짧은 기간 안에 세 번째 사례가 발생하면서 번은 몰수될 위험에 처했다. 이에 나리요시는 나리무네의 세 살 된 딸 시바히메와 약혼하고, 다테 무네요시라는 이름을 사용했으며, 센다이의 11대 다이묘로 선포되었다. 석 달 후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에게 공식적으로 알현하고, 이에나리의 이름에서 한자를 받아 다테 나리요시가 되었다. 그는 종4위 하위 관위가명 ''무쓰노카미''를 받았다.[1]

2. 3. 번주 시절

나리요시는 센다이 번의 5대 다테 요시무라의 손자였으며, 이치노세키 번의 다이묘다무라 무라스케의 넷째 아들이었다. 에도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의 이름은 기치고로(吉五郎)였다. 나리요시가 태어난 직후, 그의 아버지는 은퇴하고 번을 다무라 무네아키에게 넘겨주었다.[1]

1812년, 겐푸쿠 의식을 치르고 '''다무라 아키요시'''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그러나 다무라 무네아키는 아키요시를 후계자로 입양하는 것을 거부했고, 아키요시는 이치노세키로 보내졌지만 공식 직함이나 임무를 받지 못했다. 1819년, 아오바 성으로 소환되면서 전환점을 맞았다. 다테 나리무네가 후계자 없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센다이 번은 도쿠가와 막부와의 관계에서 매우 불안정한 입장에 놓였다. 다테 나리무네와 그의 전임자 다테 치카무네는 모두 후계자 없이 사망했고, 막부는 다테 가문의 지속을 보장하기 위해 특별한 조치를 취했으나, 짧은 기간 안에 세 번째 사례가 발생하면서 번은 몰수될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아키요시는 나리무네의 세 살 된 딸 시바히메와 약혼하고 다테 무네요시라는 이름을 사용했으며, 센다이의 11대 다이묘로 선포되었다. 석 달 후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에게 공식적인 알현을 받았고, 이 알현에서 이에나리의 이름에서 한자를 받아 다테 나리요시가 되었다. 그는 종4위 하위의 관위가명인 ''무쓰노카미''를 받았다.[1]

1826년, 시바히메와 정식으로 결혼했지만, 2년도 채 되지 않아 에도에서 사망했다. 그의 사망으로 센다이 번 내의 후계 문제가 다시 불거졌고, 그의 아들이자 상속자는 여전히 어린아이였다.[1]

2. 4. 사망과 후계 문제

다테 나리요시는 센다이 번의 5대 다테 요시무라의 손자이자, 이치노세키 번의 다이묘인 다무라 무라스케의 넷째 아들이었다. 1826년, 나리요시는 시바히메와 정식으로 결혼했지만, 2년도 채 되지 않아 에도에서 사망했다. 그의 사망은 센다이 번 내의 후계 문제를 다시 야기했고, 그의 아들이자 상속자는 여전히 어린아이였다.

나리요시가 사망했을 당시, 1825년 9월 6일(1825년 10월 17일)에 태어난 차남 죠사부로(후의 다테 요시쿠니)가 있었지만, 어렸고 아직 쇼군을 알현하지 못했기 때문에 막부에 가독 상속을 인정받는 것이 어려운 상황이었고, 후계자 선정은 난항을 겪었다.[1]

로주인 미즈노 타다아키라는 무쓰 국센다이 번 가신 오조 미치나오(겐모쓰)를 불러 당시 13세였던 나리요시의 정실 시바히메에게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아들을 시집보내 다테가의 양자로 삼아 센다이 번을 상속하게 하는 제안을 했다. 그러나 오조는 이를 거절하고, 일족의 다테 무네미쓰(나가토)의 아들로, 나리요시의 사촌이자 과거 번주 후계 후보였던 고고로(개명 다테 나리카니)가 나리요시의 사위가 되어 센다이 번주를 상속하게 되었다.[1]

이 나리요시의 후계자 문제에 대한 일건은 '센다이 총서 제11권'과 '300번 가신 인명 사전 1'에 기록되어 있지만, 공식 기록에는 없으며, '300번 번주 인명 사전 1'과 '센다이 시사'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1]

3. 가계

구분내용
아버지다무라 무라스케
어머니와키사카 야스치카의 딸
부인시바히메
측실오미요노 카타
장남다테 카이마루 (폐적)
장녀마사히메 (1824–1861), 다테 나리쿠니와 결혼, 센다이 번 다이묘
차녀유키히메, 하타모토 와타리-다테 씨족의 다테 쿠니자네와 결혼
측실츠네코노 카타
아들다테 요시쿠니, 센다이 번 다이묘


4. 편휘를 받은 인물


  • 다테 '''요시'''모니 (이와데야마 다테 가문)[3]
  • 다테 '''요시'''타카 (이와야도 다테 가문)[3]
  • 다테 '''요시'''모토 (와쿠야 다테 가문, 어린 시절 이름: 겐지로)[3]
  • 이시카와 '''요시'''미츠 (각타 이시카와 가문(무쓰 이시카와 씨))[3]

참조

[1] 문서 実子としては三男である。[[田村宗顕 (一関藩主)|田村宗顕]]は養子ではあるが嫡子で、村資の三男として扱われるため、斉義は四男となる
[2] 서적 仙台叢書
[3] 문서 伊達氏の通字「宗」や「村」を使用すると養父の斉宗(10代藩主)、その父・[[伊達斉村|斉村]](8代藩主)と同名になるのを避け、「義」の字を諱の2字目に用いた。また、[[中村景貞|中村義景]]・義房の父子は、逆に斉義の偏諱である「義」の字を避け景貞・景房に改名している。
[4] 문서 父・田村村資の実弟にあたる。
[5] 서적 仙台叢書 第一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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